새벽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열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고, 저녁에 북을 쳐서 성문을 닫으면 통행을 금지한다는 ‘진종모고(晨钟暮鼓, 새벽에 종을 치고 저녁에 북을 치다)’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것은 성문 개폐에 관한 당나라의 규칙과 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종고루는 진종모고의 독특한 역할로 인해 중국의 옛 도읍인 한나라와 당나라의 장안성, 육조(六朝)의 고도 남경, 북송의 동경 개봉(開封), 원·명·청 시대의 북경성 등 도시들에서 ‘기준점’이 되었다. 사람들은 종고루 덕분에 계절의 변화를 알고 아침과 저녁의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시보(시간을 알리다) 기능 외에도 종고루의 우뚝 솟은 성루는 일부 지역에서는 호위, 순찰, 조기 경보의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했다.
중국 시간문화의 중요한 매개체로 오늘날 전국에 30여 개의 종고루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명청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일부는 후손들에 의해 수리되거나 재건되었다. 종고루들의 규모는 각기 다르지만 각자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비록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한 때는 온 도읍이 그들의 부름을 듣고 아침에 일어나고 낮에 일하며 밤에 잠들었던 오랜 세월 동안 그 옛 도읍으로부터 들려오는 메아리는 묵묵히 가라앉아 앞으로도 전해져 내려갈 것이다.
베이징 종고루가 지닌 제국의 기상
중심축은 중국 고대 도읍의 중추로 중요한 건물들이 연결돼 경관질서를 구축했다. 원·명·청 3대가 세운 공로가 집약된 베이징 중심축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전통도시의 중심축 중 하나다. 베이징의 중심축 최북단에는 두 개의 ‘시간 건축물’인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가 자리잡고 있으며 웅장하고 제국의 기상이 넘쳐난다.
“붉은 담에 노란 기와를 얹은 고루가 앞에 있고, 회색 담과 푸른 기와를 얹은 종루가 뒤에 있다. 고루는 뚱뚱하고 종루는 얇다.”이는 류신우(刘心武) 작가가 소설 <종고루>에서 베이징의 중심축에 있는 이 두 랜드마크 건축물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원·명·청 3대의 시보 중심지인 베이징 종고루는 유구한 역사, 거대한 종과 북, 앞뒤로 세로놓인 건축구조가 전국 종고루 가운데 유일한 것이다. 원(元)나라 지원(至元) 9년(1272년)에 세워진 종고루는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는데 현존하는 고루는 명나라 건축물이고 종루는 청나라 건축물이다.
고루는 높이 46.7m, 부지 면적이 약 7000㎡의 겹처마 지봉의 목조 누각 건물로 높이는 4m의 벽돌로 쌓은 성대 위에 앉아 있고 회통 기와, 녹색 유리로 덮여 있으며 사방의 붉은 담벽은 역사의 파란만장함을 담고 있다. 고루에는 원래 25개의 시간을 알리는 북이 있었는데 1개는 주고(主鼓)로 한 해를 상징하고 24개는 군고(群鼓)인데 24절기를 상징한다.
고루에서 북쪽으로 약 100m 가면 종루가 있다. 높이 47.9m, 부지 면적이 약 6000㎡의 종루는 겹처마와 산꼭대기식을 채택하며 대들보·도리·처마·서까래·두공·암창 등의 부재가 석재로 조각되어 있어 매우 정교하다. 종루 2층의 팔각형 종틀 아래에는 명영락 연간에 구리-주석 합금으로 주조된 시보 동종이 걸려 있다. 동종은 높이 5.55m, 무게 약 63t으로 중국의 ‘고대 종(古鐘)의 왕’으로 불리며 종을 치면 그 종소리가 우렁차고 길게 울려퍼졌다.
600여 년의 시보 역사 동안에 베이징 종고루는 줄곧 북을 먼저 치고 그 다음에 종을 치는 순서로 매일 저녁에 북을 치는 것부터 하루의 시보를 시작하고 새벽 종을 치는 것에서 끝났다. 종과 북을 칠 때 모두 108번이 울렸는데, 옛 사람들이 12개월, 24절기, 72후(候, 24절기에 해당하기 위해 5일을 1후로 하고 1절기를 3후로 하며 1년을 72후로 한다)를 포함하여 한 해를 나타내기 위해 ‘108’을 사용했기 때문에 종과 북은 모두 108을 울린 것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도시 전체의 일과 휴식 시간을 장악했던 베이징 종고루는 이미 시간을 알리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뚝 솟은 자태로 수도의 발전과 변천을 주시하며 옛 베이징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켜보고 있다.
육조 고도의 진종모고
‘진종모고’에 관해 육조 고도 남경에도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매일 새벽과 황혼 무렵 고루의 북소리와 함께 성 중앙에 위치한 고루에서 재빠른 말 13필이 뛰쳐나와 13개 성문을 향해 질주해 성문의 개폐를 통제했다. 우렁찬 북소리가 도시 곳곳에 울려 퍼졌고 주민들은 종소리와 북소리에 맞춰 하루 일과를 준비했다.
명나라 도읍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난징고루는 명나라 홍무 15년(138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마침 성벽으로 둘러싸인 기하 도형의 중심인 오늘날 장쑤성 난징시 고루구의 베이징동로 등 5개 주요 간선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도읍 전체의 시간을 통일하기 위해 건설한 이 시보기구는 또한 문무백관이 정무를, 백성들이 경작을 부지런히 하도록 촉구하고 도성에서 왕을 영접하거나 대신들이 조서를 받거나 왕비를 뽑는 등 중대한 축제 때 사용했던 중요한 건물이기도 했다. 고루는 높이 40m의 고루 언덕 위에 상하 2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성궐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권문(券門) 3개가 있어 앞뒤를 관통하고 있다.
난징고루는 200여 년의 평온한 시간을 보낸 후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의 전쟁으로 소실되고 성곽의 터만 남았다. 강희(康熙) 황제가 남방으로 순찰했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봤으며 ‘결기애민(洁己愛民), 봉공수법(奉公守法), 격탁양청(激浊扬淸), 체혈민은(体恤民隐)’이라는 훈계를 남겼다. 이에 양강총독이 고루 받침대에 이 제왕의 칙유를 새긴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건물을 지어 ‘비루’로 개칭하여 난징고루는 ‘명고청비(明鼓淸碑)’라 불리게 되었다.
고루에서 동북쪽으로 600m가량 떨어진 대종정공원에는 청나라 시대의 종루가 서 있는데 그 안에는 명홍무 연간 자동으로 주조된 대종이 걸려 있다. 원래 종루는 청 강희 연간에 무너져 광서(光緒) 15년에 다시 정자를 지어 종을 달았는데 종정의 높이는 약 14.5m였고 육각 교차보를 얹고 대종이 대들보 아래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매우 장관하여 대종정이라고도 한다. 정자 옆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 금릉성(난징의 옛 이름)에는 인재와 문화가 집결하여 지척 간에 135년의 세월을 견딘 정자, 319살의 나무, 636살의 종이 모였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무쌍하니 이런 물건들이은 그대로 있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미 사라졌다니 참 감개무량하다.
천하 제일의 시안 종고루
명태조 주원장은 확실히 ‘고루광’이었는데 많은 도시의 고루가 그의 집권기에 건설되었다. 안개비가 자욱한 가운데 기초를 다져 난징고루보다 2년 먼저 지어진 시안고루는 명 홍무 13년(1380년)에 지어졌으며 이어 4년 뒤에 시안종루도 짓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종고루 광장을 사이에 두고 아득히 마주보고 600여년 동안 시안성을 지켜왔으며 중국의 현존하는 종고루 중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고루는 시안시 내 시다졔의 베이위안먼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각형 받침대 위에 세워진 높이 약 36m의 대들보형 누각 건물이다. 위아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허리처마와 평좌(平座)가 있고 2층은 겹처마로 톈안먼(天安門)과 닮았으나 그 높이는 톈안먼보다도 1m 높다. 시안고루는 명나라 때 전국 군정의 요충지이자 고루 건축설계의 모범적인 작품이며 건축규모, 역사적 가치, 예술적 가치 면에서 모두 전국 동 종류 건축물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시안 종루는 시안시 동, 서, 남, 북 4개 거리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절한 도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종루를 통째로 이 자리에 옮겨온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종루의 처음 위치는 고루의 서쪽이었으나 지은 지 약 200년 만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예를 들면 종루의 지하에 큰 가물치가 있어 자주 풍랑이 일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종루를 옮겼다는 설이 있었다. 사실, 시안 종루의 위치는 도시의 발전과 확장으로 이전되었다.
시안 종루는 원래 고루와 동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당시 이곳은 남북 성문과 바로 맞닿아 있었고 성의 중심이었다. 명나라 때 서안성을 확장하면서 성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종루의 위치가 중심과 서쪽으로 기울어졌기에 명 신종 만력 10년(158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종루를 이전하여 건립했을 때 ‘건물의 기초 외에 아무것도 새롭게 지지 말라’는 명에 따라서 명나라 초기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높이 36m의 우람하고 웅장한 종루는 어떻게 서쪽에서 옮겨왔을까? 원래 종루는 전체적으로 끼워 맞춘 구조를 채택하여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할 때 각 부재에 도면에 따라 번호를 매기고 해체하여 현 위치에 다시 설치하기만 하면 되었다. 참으로 중국 노동자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